티스토리 뷰

즐거운 일로 가득했던 해라 그런지, 올해 회고는 미루지 않고 부지런하게 작성하게 됐다. 내가 회고록을 제때 쓰는 일도 생기고,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울타리를 나온 프로그래머

2022년 2월 11일, 이전 회사에서의 마지막 출근 날이었다.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분들도 있었고, 고마웠다며 선물을 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인사를 마치고 마지막 퇴근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사람들 곁을 떠나려는 걸까. 막상 울타리를 나올 때가 되니 덜컥 겁이 난 거다. 하지만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스스로 돌아갈 곳이 없다는 마음으로 나왔으니, 어떻게든 앞을 향해야 했다.

 

그렇게 2022년 2월 14일, 꿈에 그리던 회사에 출근을 하게 됐다. 첫 한 달은 팀의 코드에 익숙해지는 것이 목표였는데, 잘 안됐다. 역시 면접 때 사람을 착각한 게 틀림없다고 자책하면서, 아침 출근길마다 '수습 기간에 탈락하면 어떻게 해야하나'라는 고민만 반복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느 날부터 코드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안도감과 동시에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2015년 첫 회사에서 똑같은 경험을 했었다. 서버 프로그래머로서의 첫 업무로 신규 슬롯(아직도 이름까지 기억난다) 개발 업무를 받았는데, 코드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 때도 오만가지 망상과 걱정을 했는데, 신비로운 '어느 날' 덕에 일정을 지킬 수 있었다.

 

지금이야 해프닝이지만 (많은 개발자가 겪는 과정이기도 하고) 당시에는 스스로 느끼는 압박감이 심했다. 이미 경험했던 일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됐을 일이었는데. Don't Repeat Yourself 원칙은 삶에서도 통한다. 쓸데없는 걱정도 반복하지 말자.

팀으로 일하기

4년 전 회고에서 더 이상 혼자 일하기 싫다는 말을 했었다. 올해부터는 총 10명으로 구성된 팀에서 일하게 됐으니, 오랜 바람이 이뤄진 셈인데, 처음에는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다. 혼자 일한 기간이 너무 길어져 고독사 직전까지 가다 보니, 무엇을 위해 팀으로 일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고, 혼자 일하는 게 더 편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혼자 일을 오래 하다보면 암흑진화를 하게 된다

다행히 팀에 합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겐 여전히 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을 팀으로는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혼자라면 할 수 없는 일이 참 많았는데, 그때마다 팀의 존재가 큰 도움이 됐다.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면, 업무적인 측면에서나 개인적인 성장의 측면에서나 팀의 덕을 본 일이 참 많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올해의 독서

올해의 목표는 50권 이상의 책을 읽는 것이었는데, 총 30권으로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1분기에만 17권의 책을 읽었기 때문에 당연히 초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인생은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대신 반성의 의미로 내년부터 읽을 책을 미리 사두었다. 이제 새로운 환경에 적응도 마쳤고 심리적인 부담감도 많이 덜어냈으니 좀 더 여유로운 독서 생활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아래는 올해 감명 깊게 읽었던 책들이다.

특히, 마음은 쓰가루와 함께 쌀쌀한 겨울이 되면 꼭 다시 읽고 싶어진다.

이 세상에 나쁜 부류의 인간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게 처음부터 악인으로 정해진 사람은 아무도 없네. 평소에는 다들 착한 사람이지. 적어도 다들 평범한 사람들이야.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막상 다급해지면 순식간에 악인으로 변하니까 무서운거야. 그래서 방심할 수 없는 걸세.
- 마음, 나쓰메 소세키
"가끔 거짓말을 하거든, 우리가. 어떤 드라마가 눈처럼 세상 바뀌는 걸 한순간에 보여주겠나"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이어령

영원히 게임 개발자

최근에 업데이트한 신규 컨텐츠는 도전적인 시도로 가득했다. 덕분에 개발 기간 내내 어려움이 많았지만, 결과물은 만족스러웠다. 수도 없이 테스트하면서도 재미있었다. '이상하다. 이거 왜 이렇게 재밌지?'라는 생각으로 업데이트 당일까지 반신반의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업데이트 당일, 커뮤니티에서는 폭발적인 반응이 터져 나왔다.

 

게이머로 살아온 지 20여 년이 됐지만, 유저들이 이 정도의 호평을 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게 현실인가? 꿈인가? 벅차오르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하기도 했다. 내가 개발에 참여한 컨텐츠를 이렇게 많은 유저들이 재미있게 즐겨준다고? 회사에서 울 수도 없고 참 난감했다. 그런 와중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어렸을 적, 내가 만든 게임 세계 안에서 많은 유저들이 행복하게 뛰어노는 상상을 하곤 했다. 하지만 첫 회사에 취업한 뒤 내가 꿈꾸던 것과는 많이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후, 처음엔 걷지 못한 길을 부정했다. '어차피 똑같을 거야', '같은 게임인데 크게 다를 거 있겠어' 그러고는 게임 개발보단 개발에 집중하면서, 그 꿈은 어린 날의 환상일 뿐이라 치부했다.

 

재작년쯤부터는 '내가 여전히 게임 개발자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대답은 예와 아니오의 중간이었다. 그 뒤엔 '내가 앞으로도 게임 개발자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대답은 아니오에 가까웠다. 같은 질문들을 지금의 나에게 한다면, 대답은 모두 '예'다. 나는 이제 영원히 게임 개발자로 남고 싶다.

 

얼마전 우연히 블라인드에서 본 글. 이런 낭만있는 사람들...

감사했던 이야기들

"될 만하니까 됐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너 해보고 싶은 거 다 하고 나면, 또 같이 일하자"

"내 손을 떠난 결과물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최선을 다했으면 된 겁니다"

 

올 한해 내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되었던 이야기들이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는 분들이 곁에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이다.

2023년을 맞이하며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2021년에 연금술사를 읽으면서 뭐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만 늘어놓는 소설이 있나 싶었다.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소망을 이뤄준다니. 삶에서 염세의 끝을 달리던 시기라 그런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 저 문장을 보면, 게임 저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뭐라 표현할 순 없지만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 그래서 애정하는 게임.

꿈에 그리던 회사에 합격한 것도, 울타리에서 나오기로 결심한 것도, 환상이라 치부한 소원을 이뤘다는 것도. 누군가 2021년의 나에게 내년에 네가 겪을 일이라고 했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믿는다. 더 좋은 개발자이자,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끝끝내 자아의 신화를 찾아냈으니 말이다.

'Blog' 카테고리의 다른 글

7년차 게임 서버 프로그래머의 2021년 회고  (13) 2022.01.29
4년차 게임 서버 프로그래머의 2018년 회고  (2) 2019.05.26
블로그 시작  (0) 2018.04.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