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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회고록을 써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결국 현실에 치여 한 해를 날려 보내곤 했는데

 

개인적으로 2021년은 꼭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해였기 때문에, 2018년 이후 3년만에 회고록을 작성하게 됐다.

 

내가 23살에 썼던 회고록과, 26살에 쓰는 회고록의 느낌이 어떻게 다를지도 자못 궁금하다.


슈퍼맨이 되고 싶은 프로그래머

내 첫 사수이자 팀장님이셨던 분은 그야말로 슈퍼맨 같은 프로그래머였다.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역할의 모든 방면에서 뛰어나신 분이자, "나도 경력이 쌓이고 시니어가 되면 저런 슈퍼맨이 될 수 있을까?" 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게 만들어주는 분이었다.

이제 나도 흔히들 얘기하는 시니어 프로그래머 레벨에 진입했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왕도물이 아니고, 나는 탄지로가 아니었다. 나는 슈퍼맨 같은 프로그래머가 되지 못했다.

 

아무나 될 수 있으면 슈퍼맨일리가

모든 프로그래머가 슈퍼맨이 될 수 있는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지만, 나는 아직도 슈퍼맨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는 내 프로그래머 인생 평생의 숙제이자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용의 머리가 되려고 노력하면, 용의 몸통까지는 될 수 있다' 는게 나의 신념이니까.

황천항해 (荒天航海)

2021년은 프로그래머로서 정말 험난했던 한 해였다. 무점검 메인 데이터베이스 이전, 분산 환경에서의 동기화, 수집형 컨텐츠 도입, CI/CD 환경 구축, 오토 스케일링, ElasticSearch 도입 등... 수년에 걸쳐서 해야 할 경험을 압축해서 한 해에 모두 해치워버린 느낌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웃으면서 회고록을 쓸 수 있는 것은, 모든 작업을 큰 문제없이 끝마쳤기 때문이리라. 모든 것을 무탈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에는 내가 프로그래머로 살면서 세운 두 가지 원칙이 큰 도움이 되었다.

 

  • 절대 한가지 생각에 매몰되지 마라
  • 어딘가에 결함이 있다고 가정하고 리뷰해라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는 만능 원칙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최소한 나한텐 큰 도움이 되었으니 그걸로 OK입니다. 

 

험난했던 만큼 값진 경험을 했기에 결과적으론 만족스러운 한 해였다. 특히 무점검으로 메인 데이터베이스를 이전했던 것과, 분산 환경에서의 동기화 이슈를 처리하기 위해 했던 고민들은 어떤 책에서도 얻을 수 없을 만큼 큰 자산으로 남았다. 그리고, 내가 인생에서 세운 몇 안 되는 원칙들이 꽤 쓸만하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사실에도 큰 의의를 두고 싶다.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지혜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막연히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훗날 내 자녀가 "아빠,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가요?" 라고 물어봤을 때 해줄 수 있는 답이 없다고 느꼈을 때였다.

 

책과 담을 쌓은 지가 꽤 오래되어서 걱정했지만, 2021년 독서의 시작을 총, 균 쇠(무게만 1kg)로 했던 덕분인지 웬만큼 읽기 힘든 책도 너끈하게 읽을 수 있었다. '총균쇠보단 읽기 쉽네' 가 내 마법의 주문이었다.

2021년 독서 기록 중 일부

2021년에는 대략 50여 권의 책을 읽었다. 인상적인 작품도 많았고, 좋아하는 작가도 생겼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다섯 가지만 꼽자면 이방인, 월든, 초인수업, 사양, 자유론. 두고두고 읽고 싶은 작품들이다. 좋아하게 된 작가는 다자이 오사무, 알베르 카뮈. 가장 읽기 어려웠던 작품은 빈 서판. 책의 난이도라는 것을 수치로 표현하긴 힘들겠지만, 차라리 총, 균, 쇠를 10번 읽는 게 더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라 썼다가, 그 다음은 쓰지 못했다. / 저자의 식견에 대한 감탄과 동시에 내 끈기에 감탄하게 된 책

아직까지는 책을 읽음으로써 좀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된 것 같진 않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읽어 나갈 예정이다. 일단 재미있으니까. 누가 취미 물어볼 때 자신감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건 덤이다.

이직 준비

폭풍 같은 1~3분기를 보내고 4분기에는 약간의 여유가 생겼는데, 조금 뜬금없지만 이때 이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나 스스로에 대한 레벨 체크와 자격지심이었다. 다른 회사에서 평가하는 나의 가치가 궁금하기도 했고, 19살부터 나를 이끌어주신 현 회사의 개발팀이라는 울타리 바깥으로 벗어나면"나는 프로그래머로서 뭐가 남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편안함과 익숙함이 오히려 스스로에 대한 증명을 갈구하는 불안 요소였던 것 같다.

 

세 곳의 기업은 서류전형에서 탈락했고, 네 곳의 기업은 서류전형을 통과했다. 탈락한 두 곳은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지원한 터라 아쉽지 않았지만, 한 곳은 당시에 재미있게 하고 있었던 게임이고 나름 기대도 했기에 아쉬움이 컸다. 서류전형에 통과한 기업은 매우 유명한 RPG 게임사(이하 A사), 게이머들에게 유명한 중견 게임사(B사, C사), 그리고 엔씨소프트였다. B사와 엔씨소프트는 추가로 코딩테스트가 있었는데, 다행히 합격했다.

 

C사는 내가 기대했던 롤과 차이가 있어서 면접을 진행하지 않았고, 나머지 3개의 기업은 B사 -> A사 -> 엔씨소프트의 순서로 면접을 진행했다.  서류와 코테만 통과하면 내가 해온 것들에 대해서는 면접에서 잘 풀어낼 자신이 있었기에, 느낌이 좋았다. B사는 무난한 면접을 치렀고, 본 게임은 A사부터였다. A사의 면접은 정말 열심히 준비했고, 결과는 탈락이었다.

 

그러나 2차 면접을 진행하는 일은 없었다...

A사의 면접 경험은 최악이었다. 면접관들의 지각은 차치하더라도 이력서를 아예 읽지 않고 참석한 듯한 느낌과, 공고의 롤과 전혀 다른 인프라 쪽에 관련된 질문만 받았다. 면접을 시작하고 10분도 채 되지 않아 이건 탈락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럴 거면 서류전형은 왜 통과시켰나 싶은 마음과 동시에, 내가 면접관들에게 이 정도 취급밖에 받을 수밖에 없는 프로그래머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바로 다음에 있는 엔씨소프트 면접도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

그런데, 생각 외로 엔씨에서의 면접 경험은 최고였다. 판교의 랜드마크 엔씨소프트 본사 건물을 보고 터질뻔한 심장을 부여잡고 간신히 들어갔더니, 면접자를 위한 대기실까지 따로 있었다. 정시가 되자마자 면접 장소로 안내를 받았고, 면접관 분들은 이미 모두 착석해 계셨다. 내 이력서를 정말 꼼꼼히 보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을 디테일한 질문과, 기술적으로 수준 높은 질문들을 면접시간 내내 받았다. 합격 여부와 관계없이 나오면서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던데, 면접도 면접으로 잊어야 하는가 보다.

 

긴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온 몸으로 표출했다는 것만 제외하면,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선에서는 모두 대답했다고 생각했다. 다만,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이슈에 관한 질문들도 꽤 있었기 때문에 합격에 대한 기대는 단 1%도 없었다. 그런데, 워킹데이 하루 만에 합격 메일을 받았다.

"엔씨에서 나를 왜...?"

재택근무를 하다가 너무 놀라서 집에서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난다. B사에서도 합격 소식을 받게 되어 2021년 연말에는 B사 2차 면접을, 2022년 새해에는 엔씨의 2차 면접을 보게 됐다. B사의 2차 면접 경험이 그냥 평범했다면, 엔씨는 사내에 면접관 수업이라도 있는건가 싶을 정도로 좋은 경험이었다.

 

물론 좋았던 경험과는 별개로, 스스로 평가한 나의 2차 면접 점수는 7~80점 정도였기 때문에 역시나 합격을 기대하진 않았다. 미련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정리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같은 IT 업계에 있는 친구들에게 "만약 내가 엔씨에 합격하면 너네가 사달라는거 다 사주겠다" 는 약속을 했었다. 이 때 B사에서는 이미 최종 합격 소식을 들은 상태였고, 당연히 나의 2021년 레벨 체크는 여기서 끝이겠거니 생각했다.

시즌 2호 "엔씨에서 나를 왜...?"

그런데 워킹데이 이틀 만에 합격 메일을 받았다. 이번엔 너무 놀라서 소리도 못 질렀다. 점심시간 즈음이라 밥을 먹고 있었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가는 현실에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밥을 못 먹고 다 버렸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멍 때리다가 그제야 현실임을 깨닫고 정신을 차리고 허거지겁 입사에 필요한 서류들을 발급받기 시작했다.

 

결국 해를 넘기면서까지 진행했던 이직 준비는, 두 기업 모두 최종 합격이라는 좋은 소식으로 보상받을 수 있었다.

 

가끔은 현실이 왕도물 같을 때도 있나보다.

울타리를 벗어나서

처음 이직 준비를 시작했을 땐, 어딘가에 최종 합격하더라도 실제로 이직할 생각은 거의 없었다. 내 희망 연봉은 객관적인 지표만 있다면 현 회사에서도 충분히 맞춰줄 수 있는 수준이었고, 19살 때부터 함께 일해온 개발팀이라는 울타리 바깥으로 나갈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종 합격한 B사에는 죄송하게도 입사 거절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나에게 엔씨소프트는, 이 울타리를 부수고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만 하는 기업이었다. 이유를 구구절절 얘기하자면 끝도 없는데, 아마 반 페르시도 이런 마음에서 작은 아이가 속삭였다는 짧은 말로 퉁친 게 아닌가 싶다. 나도 내 안의 작은 아이가 엔씨소프트로 가라고 속삭였다.

 

우리... 아니 나는 엔씨로 간다!

7년여간 내가 속해있던 울타리를 벗어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용기와 결심이 필요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도 며칠을 고민했던 것 같다. 다행히 모든 분께서 내 선택을 존중해주셨고, 울타리의 정문을 열고 당당하게(?) 나올 수 있었다.

 

퇴사 인사 메일 초안까지 작성해 놓은 지금은 기쁨보단 뒤숭숭한 마음이 크다. 다 내려놓고 산속으로 도망갈까 싶은 마음도 컸던 때가 있었지만 막상 떠나려니 모든 게 아쉽고 그리운 추억으로 남아았다.

가영이 짤을 쓰기엔 너무 감사한 울타리였습니다

2022년 목표

1. 책 50권 읽기

현재 이 글을 쓰는 시점에 5권을 읽었고 2권을 더 읽고 있으니, 쉽게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2021년엔 인문학과 고전을 주로 읽었는데, 2022년에는 컴퓨터 관련 서적의 비중도 늘릴 예정이다.

 

2. 스페셜리스트로서 스스로에게 인정받기

현 직장에서 나는 기본적으로 서버 프로그래머이지만, DevOps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내가 다방면의 지식을 통달해서는 아니고, 그냥 롤이 그랬다. 반대로 엔씨소프트에서는 서버 컨텐츠 개발만을 맡게 된다. 이것저것 많이 안다는 것에 안주할 수 없는,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나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편이라 아마 힘든 한 해가 될 것 같다.

 

3. 수학 기초 복습

원래 EBS 50일 수학 강의를 절반 이상 들은 상태였는데, 이직 준비를 하게 되면서 중단하게 되었다. 엔씨 수습 기간을 마치고 다시 시작할 예정이다. 올해 목표는 수학 리부트까지 읽는 것이다.

 

4. 적당한 소비와 친해지기

퇴직금 덕에 목돈이 생겨서 총 자산 1억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근 3년간 돈을 모으기 위해 돈을 버는, 돈에게 주체를 빼앗긴 삶을 살아왔는데, 이제는 나를 위해 적당한 소비를 하는 법도 배워야 할 것 같다. 1억이 있어도 먹고 싶은 것 하나 맘대로 못 먹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돈을 안 벌고 굶어 죽는게 낫겠다.

하늘 높이 자라려는 나무들이 과연 비바람이나 눈보라를 겪지 않고 제대로 그렇게 자랄 수 있을 것인가?
....
나약한 천성을 가진 자들을 사멸시키는 독은 강한 자들에는 강장제이다. 강한 자는 그것을 또한 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 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초인수업 중)

나의 2021년을 가장 잘 표현하는 문장이다. 2022년에도 독을 강장제 삼아 이 악물고 열심히 살아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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